한 영혼을 위한 우리의 간절한 소망을 기도에 담아서 하나님께 간구하고 또 그 영혼에게 접근하여 복음을 듣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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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영목사님 목양칼럼

오늘은 제 26회 “예수 사랑 초청”을 위한 태신자 작정 주일입니다. 태신자란 한 엄마가 아기를 잉태하여 태어나기 전까지 10개월의 임신기간을 빗대어서 생겨난 단어 입니다. 물론 새로운 성도가 영적으로 태어나기까지 기간은 천차만별이겠지만 한 영혼을 위한 우리의 간절한 소망을 기도에 담아서 하나님께 간구하고 또 그 영혼에게 접근하여 복음을 듣게 하고 진행하는 과정을 뜻합니다. 한 아기가 탄생하는 것이 쉽지 않은 오랜 과정을 거치듯이 한 영혼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성도가 되는 것도 전혀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영혼에게 촛점을 맞추고 기도와 사랑으로 접근하기 원합니다. 태신자 작정 기간중에는 다음과 같은 일들을 개인이 아닌 교회적으로 진행할 것입니다. 

첫째, 그 영혼을 위해서 간절하게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한 영혼이 예수님께 돌아오기까지는 보이지 않는 영적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영혼들은 영적인 어두움의 지배 속에 있기 때문에 모든 삶의 목적은 이 세상의 보이는 것들이며 또 그것을 위해서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시고 다른 목적과 가치를 주시는, 삶의 대변혁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둠의 영들은 이런 영혼들을 순순히 내어줄 리가 만무합니다. 그래서 복음 전파는 그냥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영적인 기도로 진행되어야 합니다. 이 싸움은 혼자 할 수도 있지만 공동체로 함께 기도하고 공동체로부터 격려와 힘을 얻을 때 이길 승산이 높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할 태신자를 작정하고는 그 이름을 써서 태신자 작정함에 넣을 때 혼자가 아닌 공동의 기도 제목이 되는 것입니다. 공동으로 기도할 때 기도의 힘은 강해집니다.

둘째, 복음 전파를 위해서 작정한 영혼들에게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도록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합니다. 말씀 자체의 능력으로 인하여 길을 지나가던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도 영접할 가능성은 여전히 있지만 확률적으로 높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영혼을 향하여 복음에 귀를 기울일 수 있도록 마음의 문부터 여는 사전 작업이 필요합니다. 혹시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나 부담이 있다면 그런 담을 헐 수 있도록 마음 밭을 기경하는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첫째 목적은 교인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에 반응하여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는 것입니다. 교인으로 등록하여 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은 신앙이 들어가고 믿음으로 살아가면서 훗날에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 될 것입니다.   

“예수 사랑 초청”은 아직 예수님을 모르는 영혼들과, 오랫동안 교회를 떠나서 장기 결석하신 분들에게 촛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다른 교회에서 신앙생활 잘하고 계시는 분들은 우리의 타겟이 전혀 아닙니다. 그런 분들에게 우리 교회로 오라고 초청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시고 마치 다른 우리에 있는 양들을 빼내는 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예수 사랑 초청”을 진행하는 우리의 의도가 전혀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팬데믹 기간 중에도 핵심적인 선교와 전도사역은 쉬어갈 수가 없습니다. 많은 분들이 답답해하고 있는 이때 오히려 위기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에게 부여해주신 가장 중요한 존재 목적인 영혼을 살리는 사역을 위해서 기도하고 한마음으로 달려가고 기쁨의 열매를 맺는 영생가족이 되기를 바랍니다.

진정으로 ‘여호와께 돌아가자’를 실천하는 영생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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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영목사님 칼럼

오늘은 미국인들이 축제를 하는 독립 기념일입니다. 미국의 독립 기념일은 조선이 일본압제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광복절처럼 영국으로부터 독립이 완성되어 선포된 날은 아닙니다. 1776년 7월 4일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고 13개 주 식민지 대표단이 독립 선언문에 서명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그 서명은 바로 이곳 필라델피아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독립 선언문 원본은 우리가 살고있는 필라델피아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당시 동부지역 13개 주는 영국의 부당한 대우에 격분하여 독립 선언 이후  7년간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인 끝에 결국 독립을 쟁취할 수 있게 되었고 주권을 가진 나라로 서게 되었습니다. 그 후 국제적으로 1783년 파리 강화 조약에서 미국의 독립이 인정되면서 미국이라는 나라가 탄생했습니다. 후에 조지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주 정부를 연합하여 연방 정부를 이루게 되는 미합중국(The United States of America)이라는 명칭을 공식으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미국 건국의 실제적인 바탕은 그 훨씬 이전인 1620년에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 신대륙으로 플리머스 호를 타고 건너온 청교도들이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보스톤 인근의 플리머스에 정착한 그들은 말씀을 기초한 신앙으로 이후 미국에 대각성 운동을 일으키고 사회 변혁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미국 동부를 강타한 ‘대각성 운동’을 미국 독립운동의 전조로 보고 있습니다. 말씀을 근거로 한 복음주의 운동은 유럽의 계층사회와는 달리 신대륙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자신의 은사를 개발하고 활용할 수 있다”는 근본적 가치를 가르쳤습니다. 이 부흥 운동은 미국의 교육 시스템의 근거가 되었고, 그런 교육을 바탕으로 대학을 나온 신앙인들이 사회 각 계층에서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알던 예전의 ‘미국의 위대함’은 유능한 개인이나 정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배함’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미국 독립 기념일을 맞이하여 미국이 가지고 있는 뿌리 깊은 말씀의 근거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세워진 국가에 허락하신 귀한 복 때문에 21세기 이전까지 미국은 전 세계에 주인공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여유로운 모습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런 가장 기본적인 말씀의 토대를 사탄은 오늘날 사회에서, 교육 현장에서, 그리고 각 가정에서까지 교묘하게 무너뜨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말씀이 파괴된 피폐한 사회를 우리는 매일의 생활에서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은 학교나 사회생활에서 더 이상 예전의 미국이 아닌 성경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비웃는 현실 속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진리를 수호해야할  분명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민자들에게 계속 상기시켜주시는 미국의 역사적 교훈을 배우기 원하고, 진리를 세우는 데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여호와께 돌아가자’를 실천하는 영생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쁨은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것이고 (롬 15:13),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고 (롬 14:17)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빌4:4).

기쁨회복이란‘ 주제로 오늘부터 전가족 수양회가 진행됩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기쁨이란 어떤 저건과 결과로서의 기쁨이 아닌 믿음의 증거로서 기쁨이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그런데 이 기쁨을 세상이 주는 기쁨과 오해하기도 합니다. 신앙에서의 기쁨은 좋은 일이 생겨서 들떠있는 행복한 감정이 아닙니다. 어떤 이는 삶의 즐거움에서 기쁨을 찾으려고 하고, 세상이 주는 재물이나 짜릿한 쾌락에서 기쁨을 추구하기도 합니다. 주변의 친구들로 인한 재미난 얘기와 만발한 웃음이 기쁜 마음을 선사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이 주신 기쁨은 감정이나 그낌이 아닌 하나의 인격체로 설명합니다. 우리의 본래 엿 인격에 세롭게 옷 입힌 우리 안에 내재하시는 성령님께서 주시는 근구언적인 기쁨은 뺏어갈 수 없으며 결코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기쁨으로 항상 채워져서 매일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다윗은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멀어진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구원의 기쁨을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면서 ‘주의 성령을 내게 거두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면서 그 기쁨과 성령을 연결한 것입니다. 우리 안에 서령님을 근심하게 하는 죄를 짓거나 지속적으로 성령님께서 주시는 마음을 거절하고 반발하면 기쁨은 잠시 달아나게 됩니다. 그래서 다윗이 회개하며 부르짓은 간절한 기도는 구원의 기쁨을 회복히켜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처음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을 받았을 때는 하늘이 더 푸르게 보이고 모든 어려움을 능히 극복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깁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가면서 처음의 기쁨은 희석되기 마련이고 특히 죄성으로 인하여 삶에서의 영적 싸움에서 패하면서 구원의 기쁨이 점점 희미해지기도 합니다. 이 기끔은 우리의 순종과 맞물려 살아가면서 기복이 심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팬데믹으로 인하여 외부적인 요소가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나날이 지속될때는 기쁨이 소멸된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습니다. 아니, 기뻐하기가 싫었습니다. 하나님께 흐느끼고 괴로운 상황을 토로하며 싸웠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기쁨은 감정 상태가 아니기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기쁨 자체가 소멸되 수는 없습니다. 그냥 환경적으로 어려웠던 것이고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사귐이 회복되면 그 기쁨도 회복되고 삶에서 어려움을 차분하게 넘어서게 됩니다. 여기서 ‘회복’이라는 말은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코로나바이러스를 통해서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게 하셨고 이제는 새로운 삶의 형태를 맞춰가면서 살아야 하는 새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쁨은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기 때문에 내부적인 조건만 충족되면 회복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성도의 기쁨은 회복되어야 합니다. 기쁨은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것이고 (롬 15:13),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고 (롬 14:17)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빌4:4). 기쁨은 성령과 함께하는 삶의 열매이기에 주님을 바라볼 때 기쁨은 회복되고 강하게 역사합니다. 기쁨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서는 진정한 기쁨의 회혹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쁨을 약속하셨기에 그리스도로 채우는 사람만이 그 기쁨을 얻게 됩니다. 온전한 기쁨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자신의 연약함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채워가면서 살아갈 때 자녀들도 그런 모습을 보면서 건강한 신앙을 이어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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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영목사님 목양칼럼

아버지날이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Father’s Day는 Mother’s Day가 시작된 이후에 가정과 자녀들에게 아버지의 노고도 어머니 못지않은 것을 알리려는 의도로 제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필요성은 공감했지만 어머니에 비해서 아버지의 역할은 비교적 많은 사람들의 동의를 받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연방 의회에서 오랫동안 계류되다가 1972년에 비로서 닉슨 대통령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매년 6월 셋째 주가 Father’s Day로 제정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아버지날은 어머니날에 비해서 다소 소홀해 보이고 크게 부각되지 못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아마 아버지들이 가정보다는 외적인 일에 신경을 쓰다 보니까 가정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면이 분명이 작용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미국 교도소 안에 있는 제소자들은 아버지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지 않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즉, 자신들의 삶에 나쁜 영향을 끼친 주범으로 아버지를 지적하고 있으며 그 마음의 앙금이 교도소 안에서도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Mother’s Day가 되면 미국의 교도소에서 어머니들에게 보내지는 카드의 양은 우체부들을 바쁘게 만듭니다. 반면에 Father’s Day가 되어 아버지에게 보내지는 카드의 양은 어머니들께 보내지는 카드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 저조합니다. 아버지가 자녀들의 삶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했고 그것이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갈등으로 남아있는 것을 보여주는 현실입니다.

보통 남자는 10대가 되기 전에는 아버지를 수퍼맨으로 생각합니다. 자신도 커서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10대가 되면 아버지는 고집불통의 대화가 안되는 먹통으로 생각하고 멀리합니다. 20대가 되면 자신은 아버지와 같이 실패한 인생을 살지 않겠노라고 다짐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30, 40대가 되어서 자신이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가진 아버지가 되어서는 생각이 바뀐다고 합니다. 50대가 되어서는 나도 아버지만큼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드디어 아버지를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60대가 되어서는 드디어 내 아버지가 옳았다고 고백하는 것이 남자의 일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버지들이 가정의 영적 제사장인 것을 상기시킵니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들은 당당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가정은 우리가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도록 영적으로 깨어서 모든 가족 구성원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서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책임은 이런 영적인 모습에서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잘난 사람인가, 얼마나 유능한 가를 드러내려고 애쓰다간 후에 성장한 자녀들 앞에 진실이 드러나게 됩니다. 세상적인 자랑과 치장은 결국은 본색이 다 드러나고 자녀와의 간격만 만들게 되고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아버지는 온 가족에게 하나님을 경험시켜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연약함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채워가면서 살아갈 때 자녀들도 그런 모습을 보면서 건강한 신앙을 이어받게 될 것입니다. 이런 건강한 아버지를 둔 많은 신앙의 가정들이 모인 영생교회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인내는 신앙의 성숙함의 열매. 인내는 우리의 결단과 지구력의 산물이 아닌 은혜의 산물인 것을 성경은 확실하게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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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영목사님 목양칼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앙의 성숙함의 열매로 인내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인내에 관하여 우리는 많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4절에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라는 말씀이 있어서 우리가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는 명령으로 오해합니다. 일반적인 도덕적 인내를 열심히 일구라는 말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에는 내가 주어가 아닌 인내가 주어로 되어 있습니다. 그 말은 인내가 그 온전한 일을 하도록 하라는 말입니다. NIV성경은 “인내가 그 시작한 일을 마칠 때 우리는 성숙하게 되고” ESV도 같은 의미로 “인내가 그 효과를 다할 때 우리는 온전해진다”라고 합니다. 아쉽게도 한글 번역은 이 말씀이 암시하는 은혜의 차원을 크게 놓치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내는 우리의 노력과 끈기로 온전하게 이룰 수가 없다고 전제를 하고서 하나님의 은혜로서 이끌어주는 인내의 관점을 강조합니다. 인내는 내 노력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끊임없는 친밀한 관계가 오래 지속될 때 결국은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내는 신앙 생활에서 더없이 중요하지만 오랜 신앙생활을 했다는 분에게서도 인내의 성품이 결여된 모습을 자주 봅니다. 무엇이든지 빨리 결과를 보기 원하는 마음이 오래 참는 인내의 성품으로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때도 항상 “주시옵소서”라는 말이 입에 붙을 정도로 우리는 기도의 응답을 빨리 받기만 원하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려고 하는 다른 은혜와 성품에 소홀히 할때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오래 참는 성품을 달라고 기도하면서도 “빨리 주시옵소서”라고 열정적으로 부르짖는다면 인내의 성품이 자리잡기까지는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사랑의 특성을 말할 때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고전 13:4)를 가장 먼저 말한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에 다양한 은사를 가지고 열심히 봉사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로 인하여 교회 안에 분쟁과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봉사에 오래참음과 온유함이 결여되었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탁월한 은사로 교회 안에서 다양한 봉사를 할 수 있지만 우리의 육신은 오래참지 못합니다. 남이 따라주지 못하면 조급해하고 다른 사람의 일하는 방식이 나와 다르면 불안해 합니다. 그리고 사역의 성과를 알아주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고 큰소리가 나옵니다.

인내는 그래서 우리의 결단과 지구력의 산물이 아닌 은혜의 산물인 것을 성경은 확실하게 하고 있습니다. 시험과 고난을 통해 우리 안에 인내를 만들어내시는 이도 주님이시고 그 인내가 우리 안에서 온전한 일을 하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시험과 고난은 우리 안에 오래 참는 은혜가 있게 하시고 결국은 기도 응답과 함께 성품의 변화도 이뤄지는 것입니다. 인내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게 하고 우리를 온전하게 합니다. 우리가 하는 사역은 온전하지 않아도 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온전해지는데 하나님은 마음을 쓰고 계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