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곧 성공이라는 물질 만능주의가 만들어낸 아픈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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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영목사님 목양칼럼

최근에는 너그러운 마음이 많이 부족해졌습니다. 예전에는 운전하다가 끼어드는 차를 보고 양보하고, 스톱 싸인에서 좌회전하는 상대방에게 먼저 가라고 웃으면서 손짓하는것이 미덕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남은 안중에도 없는 차들을 목격하게 됩니다. 누군가는 식당에서 웨이터에게 대하는 태도로 그 사람을 평가한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무슨 말을 하느냐보다는 평소에 어떤 행동을 보이는가로 평가가 됩니다. 오늘날의 문제를 정확하게 짚어내는 시각을 가지고 있으면서 옳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일지라도 너그러운 마음이 없다면 인정받지 못합니다. 성경에도 우리 예수님은 율법을 철저히 지킨 바리새인들을 칭찬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들은 옳은 소리는 했지만 전혀 말한 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고 마음으로 그것을 따르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신앙이란 말 뿐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내는 것이고 내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그런 삶의 모습은커녕 너그러운 마음조차도 점점 없어진다고 합니다. 한국 뿐 아니라 이곳 미국에서도 인성이 메말라 갑니다. 내가 물이 있는데 지나가는 사람이 목말라 한다면 나눠주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이것이 올바른 인성입니다. 그런데 경쟁 사회는 남들을 제끼고 앞서가야만 성공하는 것이고 그렇게 성공해야 박수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유롭게 남을 돕는 마음은 없어지고 점점 야박해지고 이기적이 되어갑니다. 다른 사람이야 굶든 말든 다른 사람이야 목이 마르든 말든, 내 가족이 먹을 것과 마실 것 먼저 챙기고 은행에 풍성하게 저축해야만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으로 인정받습니다. 돈이 곧 성공이라는 물질 만능주의가 만들어낸 아픈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른 가치를 가르칩니다. 서로 경쟁하듯이 먼저 가려고 하지않고 양보하고 배려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가치관의 표현이고 성숙한 신앙의 모본입니다. 예수님은 강도를 만나 다치고 죽게된 자를 멈추고 돌보아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시고는 우리에게 “가서 그와 같이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주변에 어려운 사람이 있다면 내가 가진 것을 나누고, 양보하고 배려하는 것이 바로 신앙적인 삶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런 선교사님을 강단에서 만나게 되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구체적으로 나타난 변화를 세미나로 듣게 됩니다. 결코 들으면서 대리만족하라고 오신 선교사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도전이 담겨있는 말씀에 우리 마음을 활짝 열고 우리도 삶의 현장에서 적용할수 있는 도전이 될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우리는 감사에 눈이 떠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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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영목사님 목양칼럼

오늘은 감사주일이며 40년 전에 영생교회가 필라델피아에 세워진 창립 40주년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40년의 감사를 표현하자면 이 지면으로는 부족합니다만 온 교회가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께 감사를 고백하고 의미 있는 행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당회원들이 같은 마음으로 40년은 우리끼리의 행사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감사를 외부의 어른들과 나누기를 원했습니다. 필라델피아 지역의 은퇴 목사님들, 모든 한인 어른들께 감사의 선물을 전달했더니 영생교회는 자기들끼리만 하는 행사가 아니라 나누는 행사가 되었다고 좋게 보시고 좋은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이렇듯 감사는 하나님께 표현하는 것이고 주변과 나누는 것이며 내가 가진 것을 의미 있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사회는 그 이전보다 더 많이 가졌지만 덜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것은 남보다 덜 가진 것에 집중하고 비교하다 보니 마음에 만족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 어릴 때가 생각납니다. 친구 집에 흑백 TV가 처음 생겼는데 그 집에 들어갈 때 돈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기 위해 창문 너머로 까치발을 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속으로 ‘우리 집에도 저런 근사한 TV가 있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면서 몹시 부러워했습니다. 그러다가 제 부친이 월남 기술자에서 본국으로 돌아오시면서 드디어 우리 집에도 TV, 녹음기와 카메라가 생겼습니다. 그때 부모님 몰래 카메라를 어깨에 둘러메고 나가서 친구들에게 자랑할 때 수십 명이 몰려와 부러워하던 눈길과 으슥하던 어깨가 생각이 납니다. 지금은 그때와 비교도 안될 만큼 풍족한 삶을 살면서 없는 것 없이 다 누리고 있습니다. 저는 선교지에서 26년을 살다가 다시 미국에 돌아오니까 더욱 실감이 납니다. 그런데 감사는 오히려 줄어들었다고 한다면 문제는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풍족할수록 감사가 줄어든다면 신앙의 초점이 잘못된 것입니다.  

여러분, 경제적으로 어렵습니까? 40년 전에 비하면 우리는 비교적 풍족한 생활을 누리고 있습니다. 좋은 집, 고급 자동차, 여가 생활 등 모든 면에서 풍족함을 누리고 살고 있습니다. 어린 자녀들까지 스마트폰 하나씩은 가지고 있으며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 정수기, 대형 화면 TV와 자가용 등은 모든 사람들의 필수품이 되어 있습니다. 제철도 아닌 과일과 야채도 사시사철 먹고 있습니다. 아마 임금님 수라상이 안 부러울 정도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데도 행복하지 않다면 감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감사에 눈이 떠져야 합니다. 많이 가졌다고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행복은 소유의 크기가 아니라 감사의 크기에 비례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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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영목사님 목양칼럼

제 지인 중에 독일계 목사님이 있습니다. 2005년부터 로잔 디아스포라 분과위원으로 같이 활동하면서 알게 되었고 2010년 케이프타운에서 열린 제3차 로잔대회에서 “Scattered to Gather”라는 책자도 같이 출판했던 분과위원 중 한 분 입니다. 지금은 텍사스의 샌안토니오에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통화를 하다가 코비드 19 백신에 관한 얘기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비롯한 모든 교인이 백신을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세대주의 신학과 전천년설을 신봉하는 교회에서 모두가 백신을 거부하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더 이상 설명은 안했지만 저는 그 이유를 잘 압니다. 백신이 성경에 나오는 “짐승의 표”이고 백신을 맞으면 “베리칩” (Verification Chip)이 몸속에 들어간다는 신학적인 이유에서 집단으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미국 특히 남부 지역에는 종교적인 다양한 이유로 백신 접종률이 심히 저조합니다.

그래서 제가 웃으면서 그랬습니다. 우리가 함께 디아스포라 사역을 위해서 수고하면서 믿었던 하나님, 여전히 주권적으로 세계 곳곳에 퍼져가는 이주민들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그 정도밖에 안 되시는 분이냐고. 만일 우리 하나님이 백신을 맞았느냐, 안 맞았느냐로 우리를 천국 들어가고 못 들어가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나는 그런 수준의 하나님은 믿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줄을 쫙 세워놓고 백신 여부로 구원이 이뤄지거나 못 이뤄지게 구분하시는 하나님이라면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따를 이유가 없습니다. 그 하나님은 제가 사역했던 이슬람 국가에서 무슬림들이 부들부들 떨면서 율법을 지키면서도 여전히 두려움 속에 살얼음판을 걸으며 섬기는 알라신 수준밖에 되지 않습니다. 

아니지요! 우리 하나님은 그보다 훨씬 크신 분이십니다. 그보다 훨씬 능력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을 나의 수준에서 나의 틀 속에 가두어 버리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를 나의 수준으로 축소해 버릴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내가 아는 수준에서 내가 원하는 것만 응답하시는 하나님으로 만들어놓지는 않는지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큰 것을 주시려는 하나님을 그냥 박스안에 가둬 버리는 우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팬데믹이  생각보다 오래 지속된다고 마음속에 원망이 있습니까? 지금은 안 보이고 이해가 안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더 큰 은혜를 바라보지 않으시겠어요?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여전히 팬데믹의 위험은 우리 주변에 가까이 있으며 우리 모두 지혜롭게 행동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믿음으로 이겨내는 영생의 가족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이기를 힘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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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영목사님 목양칼럼

주일은 한 주간이 시작되는 첫날입니다. 그런데 성경 속의 안식일은 6일간 모든 일을 다 마치고 마지막으로 쉼과 안식을 가진다는 의미로 제정되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 해가 진 후부터 시작되어 그 다음 날까지인데 왜 개신교에서는 한주의 첫날에 해당하는 주일에 예배로 모이는지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초대 교회 때 한 주일의 첫날, 특히 우리 주님이 부활하신 날을 승리의 날로 모여서 예배와 축제로 증거하던 사도들의 전통이 그 후 교회 회의에서 주일로 선포되고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물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그 안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교회가 세워지는 곳마다 주중 가장 첫날에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된 것입니다. 예배란 성도들이 감사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경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힘을 얻고 성도들의 교제로 공동체를 같이 세워가며 함께 신앙의 진전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방식으로 적합한 장소에서 경외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로 인하여 조그만 공동체가 영적으로 무장되고 그로 인하여 복음이 확장되어 세계 전역으로 영향을 끼치도록 쓰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일에 예배당에 모여서 공적 예배를 드리던 사도들의 전통이 팬데믹으로 인하여 또한 현대 컴퓨터 기술이 발전하면서 현대인들이 편리한 방식으로 어디서든 자기가 참여하고 싶은 시간에 온라인으로 접속하여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대안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예배는 그저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비상상황에서의 해결 방안일 뿐입니다. 그런데 팬데믹 시기가 길어지면서 예배당에 와서 성도들과 함께 드리던 예배가 변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예배를 소홀히 하기 시작하고 예배에 대한 태도가 점차 신앙의 게으름으로 드러나는 모습도 나타납니다. 작년 3월부터 현장 예배에 나오지 못하는 분들에게 심방 가서 여쭈면 온라인 예배조차 소홀히 하는 모습에 심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온라인 예배도 시간 내에 마음의 준비로 드려졌지만 이제는 인터넷의 편안함에 편승하여 마음의 준비도 없이 다양한 예배를 섭렵하며 내 목적을 채우는 수단과 방법이 되어가고 있지 않은지 살펴야 합니다. 그러다가 귀만 솔깃하게 하는 가짜 신앙이나 하나님 중심이 아닌 이단들에게 쉽게 휘둘릴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성도들에게 “모이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인터넷이 없던 2천년 전의 환경에서 나온 말씀이라고 하찮게 취급 할 수는 없습니다. 모이는 습관을 실천하는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믿음으로 굳건하게 세워진 역사적 사실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일 때 서로를 격려하고 지원하여 양육의 기회를 얻습니다. 아니, 모이지 않는다면 공동체가 주는 이점을 유용하게 내 것으로 만들 수도 없고 내가 다른 사람에게 선한 도구로 쓰임받을 수도 없습니다. 백신을 맞았다고 마음을 놓고 예전처럼 돌아가자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의 중심에 예배를 드리기 원하는 열심이 세상의 그 어떤 열심보다 더 확실한가를 자신에게 확인하고 점검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배란 온전히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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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영목사님 목양칼럼

오늘은 세계의 모든 개신교회가 지키는 ‘종교개혁기념일’입니다. 종교 개혁을 통해 ‘인간 중심의 교회’에서 ‘하나님 중심의 교회’로 개혁을 시도한 지가 벌써 504년이 되었습니다. 예전에 종교 개혁은 말 그대로 “하나님께로 돌아가자”였습니다. 인간이 중심이 되어 하나님을 이용하면서 자기의 목적을 달성했던 종교의 틀을 종교개혁으로 깨뜨린 것입니다. 하나님보다는 모든 영광을 자신이 받기 원했던 로마 교황과 그 밑에서 동일하게 종교를 이용했던 주교들이 예수님 시대의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의 모습과 겹쳐 보입니다. 아니, 그런 모습은 사실 지금도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에서 여전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요구하는가’보다는 교회 전통과 관행에 더 집중하며 지키는 겉껍데기의 신앙과, 자신의 해석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진리보다 더 앞선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최근에도 여전히 종교 개혁의 필요성이 계속 대두되는 것은 중세시대의 인본주의 사상이나 지금의 인본주의 신앙이 서로 맞물려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역사를 반복하고 지난날의 잘못된 것을 반면교사로 삼지 못하고 다시 죄성에 빠져드는 연약함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자기 마음대로 제사를 드린 사건이 여러 번 나옵니다. 그런 행동들의 중심에는 모두 다 흡사한 동기가 있습니다. 자신의 열정에 휩싸여 독선적으로 되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가’에는 관심이 없고 ‘내가 이렇게 열심이다’라는 것만 주변에 보여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 마음의 욕구가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알고 행하는 것보다 더 앞서게 된 것입니다. 보세요, 사울왕에 대한 하나님의 지적은 무엇입니까? 사무엘이 오지 않자 자신이 예배를 진행한 것을 지적한 것이 아닙니다. 사울왕 자신이 주도하여 예배를 드렸던 행동과 마음의 중심에는 하나님께 예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목적에 이용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런 동기의 예배는 종종 하나님을 모욕하는 수단이 됩니다.

예배를 통해 내 욕심이 들어가고 내가 받기 원하는 것을 예배를 수단으로 받는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올바른 예배자가 아닙니다. 예배란 온전히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내 초라함을 보고 은혜의 보좌 앞에 겸손히 나오는 것이 예배의 가장 기초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온전함이란 결코 우리는 죄가 없다고 하는 교만한 마음도 아니고 내 열심을 드러내며 인정 받으려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솔직하게 나 자신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무릎 꿇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쌓여갈 때 신앙의 깊이가 생기고 인격의 성숙함이 채워지게 됩니다. 올해 표어가 “신앙의 진전을 이루자”입니다. 말씀이 거울 되어 나 자신을 바로 볼 수 없다면 신앙의 진전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자가 되어서 은혜로 나 자신이 세워지고 더욱 아름답게 빚어져 가는 영생 가족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