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자의 마음과 태도 그리고 그 예배의 중심과 예수님의 진리가 있느냐가 더 중요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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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영목사님 목양칼럼

팬데믹으로 인하여 접촉을 기피하는 모습에서 나온 용어가 “언택트”(Untact)입니다. 접촉을 뜻하는 Contact에 부정적인 의미를 주는 Un 을 접두사로 연결한 것 입니다. 한국어로는 “비대면”이란 말을 사용합니다. 그러다가 재택근무가 사회적 현상이 되었고 뿐만 아니라 온라인 수업, 온라인 예배, 온라인 콘서트가 확산하면서 온라인을 뜻하는 On의 접두사로 표현되는 “온택트” (Ontact) 라는 말이 언젠가부터 자연스럽게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일 년간 세계는 그냥 정지해 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발전을
거듭했습니다.

그동안 서서히 진행 중이던 고객을 직접 마주하지 않는 온라인 주문과 배송하는 기술적 발전이 팬데믹이라는 복병 때문에 훨씬 빨리 우리 곁에 다가오게 되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이제는 전시회, 공연, 심지어는 집에서 세계의 유명한 관광지를 인터넷으로 경험할 수 있는 랜선 투어까지 상품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다양한 스마트 기술이 코로나 시대를 지나면서 상상을 초월하는 발전을 이루고 소비자들에게 간접적인 경험을 주는 체험 미디어가 빠르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교육도 ZOOM이나 Google 미팅이란 플랫폼을 사용하여 온라인 수업을 진행하는 것이 이제는 필수가 되었습니다. 영상이나 사진을 송출하면 집에서 받아보고 숙제도 동영상으로 촬영하여 모든 학우들이 볼 수 있도록 스크린 쉐어를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학교에서 교실 앞에 나와서 발표하는 효과를 넘어서 학생들의 참여도가 오히려 높아지는 선순환적인 긍정적 반응들도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지난 일 년간 온라인으로 예배와 수련회, VBS, 성경 공부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답답하다고 하시는 분이 계신 반면, 오히려 발전했다고 격려하시는 등 다양한 반응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최근에 일 년 넘게 예배당에 못 나오시고 온라인 예배를 드리다가 백신주사를 맞으시고 다시 나오신 분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이제 숨을 쉴 것 같다는 표현을 하십니다. 영적으로 움츠렸다가 이제 살아났다는 표현입니다. 성도들은 온라인으로 개인 신앙을 지켜나가기에는 만족 할 수 없는 영적인 채움이 필요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배의 장소와 관련하여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 산 (그리심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하시면서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고 하셨습니다. (요 4:21, 24) 장소 보다는 예배의 마음과 예배의 대상이 누구인가가 더 중요하다고 확인 시켜 주신 말씀입니다.

팬데믹이 종식되면 다시 예배당에 나오느냐, 온라인으로 계속하느냐의 장소 문제보다는 예배자의 마음과 태도 그리고 그 예배의 중심과 예수님의 진리가 있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성도들과의 관계도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공동체이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은 성도들과 함께 할 때 예배의 감격도 살아나고 교회의 섬김과 베풂, 성숙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교회는 유기체이므로 서로 만남을 통해서 신앙의 진전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멘!

신앙의 진전은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인내로 견디어 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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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영목사님 목양칼럼

지난달에 미국의 화성 탐사선 ‘퍼서비어런스(Perseverance)’호는 무사히 화성에 착륙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주에 ‘인지뉴이티(Ingenuity)’라는 작은 회전날개 두 개를 가진 헬리콥터가 화성에서 공중으로 떠올랐다가 다시 착륙하는 실험에도 성공했습니다. 다른 행성에서 탐사선이 착륙한 것만 아니라 비행체가 떠다니는 실험에도 성공하여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 간 이 프로젝트의 세부 책임자인 벤 시치(Ben Cichy)는 컴퓨터 엔지니어 출신으로 MS Window 개발팀에서 경력을 쌓고 후에 우주 항공 분야로 뛰어들었습니다. NASA로 이적한 지 무려 20년을 우주여행 로켓 시스템 개발 책임자로 일하면서 이번 화성 탐사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낸 것입니다.

그는 코넬 대학 시절 겨우 낙제를 면할 GPA 2.4 성적으로 자기의 커리어를 계속 이어나가기가 망설여질 만큼 대학에서 점수 내는 일에는 자신이 없던 사람입니다. 주변에서 그에게 컴퓨터 엔지니어로 커리어를 쌓을 필요가 없다는 조언도 들었고 자신도 낙담할만한 GPA를 가지고 많이 고민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학교 성적과 엔지니어로 커리어에서의 성적은 상호 연관 관계가 없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가 한번 맡은 일은 실패가 없었습니다. 아니, 실패가 없다기보다는 성공할 때까지 실패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가 개발한 시스템이 성공적으로 작동하여 그는 마침내 평균 거리 2억 2천만 km 떨어진 붉은 행성에 탐사선을 무사히 착륙시키는 과정을 그의 눈으로 지켜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는 항상 자기가 맡은 일에 책임을 진다는 생각으로 미리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평범한 것보다는 도전적인 것을 위해서 성실하게 일을 마치고야 마는 성격이 십수년간의 시스템 개발을 위해서 인내하며 묵묵히 달려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화성 탐사선의 이름도 Perseverance(인내)호가 되었고 많은 젊은이에게 도전 정신을 일깨워준 것입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인내를 가르칩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 (눅 8:15)에 대하여 믿음이라고 제시하십니다. 바울도 데살로니가 교회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살전 1:3) 라고 격려의 메세지를 보냅니다. 신앙의 진전은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인내로 견디어 내는 것입니다. 그런 인내는 우리의 신앙에 인격이라는 옷을 입혀줄 것입니다.

아멘!

영적 전쟁 – 라마단 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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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영목사님 목양칼럼

2021년도 전 세계의 무슬림들이 30일간 금식하며 기도하는 라마단이 지난 화요일에 시작되었습니다. 이슬람은 전 세계가 사용하는 해를 중심으로한 달력을 쓰지 않고 달을 중심으로한 월력을 쓰기 때문에 일년이 355일 정도가 됩니다. 그래서 매년 라마단이 10일 정도 앞당겨집니다. 올해 라마단이 4월 13일부터 5월 12일이라면 내년에는 4월 3일에 시작해서 한 달간 진행될 것입니다. 라마단은 이슬람 달력의 아홉 번째 달이고 이슬람력은 올해가 1442년이 됩니다. 라마단이란 의미는 아랍어로 ‘타는 듯한 더위와 건조함’으로 금식의 의식이 주는 고난을 의미합니다.

매년 라마단이 되면 성인들은 새벽에 일찍 일어나 해뜨기 전에 그날 필요한 음식을 지어 먹습니다. 그리고 해 뜨고 나면 음식, 물과 담배는 물론, 침도 삼키면 안됩니다. 그러나 해가 지고 나면 다시 음식을 섭취할 권리가 주어집니다.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무슬림 가정에는 라마단 때에 음식비가 더 든다고 합니다. 새벽에 많이 먹어야만 하루를 견딜 수 있으며 하루종일 굶었기에 밤에 폭식을 하기 때문입니다. 매일 라마단 금식의 시작과 끝을 달의 움직임을 고려해서 이슬람 율법 학자들이 시간을 알려주고 각 마을의 모스크에서 확성기로 금식 시작과 해제 시간을 공포합니다. 라마단 기간에는 정부 기관, 기업, 학교의 시간이 오후 3시에 끝이 나고 각종 종교, 문화 예술행사가 열립니다. 저녁 식사 전에는 움마 공동체별로 모여서 알꾸란을 암송하고 자신들의 신에게 기도합니다.

이 기간은 영적 전쟁 기간입니다. 저도 26년 선교사역 하는 동안 모든 불상사가 라마단 기간 동안에 일어났습니다. 제 둘째 딸이 자동차 밑에 깔려 머리를 다치는 사고를 당했고 제 아들이 지붕에서 떨어져 팔이 부러지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악한 영들에게 기도할 때, 앞장서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 가족들이 공격 받아 그런 사고가 생기기도 합니다. 때론, 현지 교회에 분란이 일고 서로 비난하거나 싸움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세계의 기독교 교회가 하나가 되어서 이때는 함께 기도하며 영적으로 선교사를 보호하고, 무슬림들이 어둠의 쇠사슬에 묶인 속박에서 풀어지고 참 진리를 알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무지 속에서 회개할 의지도 없는 거짓 영에 사로잡힌 이들이 가슴 치며 통곡하며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역사가일어나도록 전 세계의 기독교인들이 하나가 되어서 기도로 무장하는 때가 이때입니다. 우리 영생의 가족들도 세계의 무슬림을 사랑하는 기도 운동에 동참하는 하나님의 쓰임 받는 손길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주님의 말씀을 적용할때 교회의 질서와 결실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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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영목사님 목양칼럼

주님께서 명령하신 ‘온 천하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라’는 선교 사역은 열정으로만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혼자서는 전진하기가 힘들듯이 그리고 교회 공동체가 필요하듯이 선교 사역도 함께하는 공동체와 그 사역을 관리하고 책임질 수 있는 단체의 소속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둘씩 짝지어 파송하셨고 그것을 미래 사역의 모델로 보여주셨습니다. 영적 전쟁터에서 사역을 진행하는 동안에 서로 의지하고 버팀목이 되는 공동체가 필요한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조직으로 만들어져서 선교 단체가 된 것입니다. 1792년 현대 선교의 아버지 윌리엄 케리 이후에 선교사역이 세계 전역으로 확산되어 나간 근거도 선교단체의 시스템을 갖춘 데 있었습니다. 성경에도 바울처럼 이동하며 전도 사역하는 팀이 있었고 한곳에 정착하여 교회를 세우고 전도하여 성도를 양육하는 모델도 존재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든 선교팀이든 다 객관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하나님의 일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조직은 하나님의 사역을 효율적으로 감당할 수 있도록 견인차 역할을 했습니다.

예전에 좋은 선교 후보생이 저에게 와서 선교사로 나가겠다는 불타는 열정을 보일 때 제가 했던 권면이 있습니다. 조금 속도를 늦추고 선교 단체에서 훈련받고 팀으로 관리를 받으면서 나가라고 했고 그렇게 진행한 사람들은 몇십 년 후에도 여전히 귀한 사역을 잘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급한 마음으로 선교지로 직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혼자서 이곳저곳에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몇 교회 후원을 받아서 선교지에서 언어 훈련이나 문화 적응 과정도 건너뛰고 열정에 사로잡혀서 사역을 펼쳐갑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은사와 재능을 급하게 현지에 쏟아붓습니다만 상황이 그렇게 녹록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선교사들은 거의 대부분 몇 년 안되어서 정신적으로 녹초가 되고 건강에도 문제를 보이며 중도에 하차하기 쉽습니다. 이것은 독립군 선교사(?)가 지난 수년간 반복해서 보여줬던 패턴 입니다.

선교사가 단체에 소속이 안 되면 현지에서 정착할 때 도움을 줄 선배도 없고, 심리적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상담할 사람도 없고, 현지 지도자와 연결점도 없이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해야 합니다. 재정적인 투명성이나 보고체계도 없으므로 재정적으로 쪼들릴 때 단체의 도움도 없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도 죄성으로 인한 연약함을 가졌기에 재정의 유혹을 쉽게 이겨내지 못하고 후원금의 공과 사를 분명히 하기 어렵습니다. 또 선교사로서 중요한 공적 책임을 건너뛰고 빠른 결과에만 집착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혼자 프로젝트를 결정하고 본국을 다니면서 모금하여 눈에 보이는 건물 사역에 집착하다가 비극적으로 끝나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현지인에게 재산권을 뺏기기 일쑤고 혹시 거대한 사역을 일구었다면 사역을 이어갈 현지 제자도, 동료나 후배 선교사도 없이 민망하게 사역을 문 닫아 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의 내용을 교회의 모든 사역에 적용할 때 그 안에서 질서도 생기고 결실도 맺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가 감당해야 할 모든 것에 좋은 길 잡이가 되기 때문입니다.

아멘!

“너는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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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영목사님 목양칼럼

죽음 이후의 미지의 세계에 대하여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죽음을 미화시키려고 합니다. 묘지를 화려하게 만들고 온갖 장식으로 치장합니다. 힌두교나 불교는 고인이 좋아하는 음식을 매일 차려서 묘지에 갖다 놓는 모습도 있습니다. 고인이 여전히 살아있다고 믿으며 자신들의 삶에 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묘지를 아름답고 깨끗한 장소로 생각하게 만듭니다. 남미와 필리핀에서는 일 년에 한번 성인을 기념하는 날이 있는데 가족들이 묘지에 모셔서 밤새워 먹고 마시면서 죽은 자와 영적인 소통을 시도합니다. 그런데 죽음은 아무리 아름답게 묘사하고 치장해도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죽음과 이별은 인간이 겪는 환란 가운데 가장 큰 시련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에게 우리는 언젠가 죽을 것이라고 말하면 어떤 대답이 돌아올 것 같습니까? 기분나쁘다고하고 재수 없는 소리하지 말라는 답변을 들을 것입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이것이 현실이고 확실한 것임에도 자꾸 피하려 합니다. 성경은 죽음이 하나님을 배반하므로 온 죄의 결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죽음은 추하고 괴로운 것입니다. 인간이 살고 있는 곳에는 질병과 재난과 죽음이 항상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이런 필연적인 삶의 과정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고 출생하는 그 순간부터 죽음을 향하여 가고 있다는 유쾌하지 않은 진실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죽음 아래 종노릇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최근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신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도 사랑하는 아버님의 소천으로 잠시 마음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만일 죽음이 끝이라면 우리는 아무 소망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죽음이 끝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부활이라는 산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친히 부활하시고 “첫 열매”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삶이 이 땅에서 끝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죽음 이후에 부활하여 영원히 주님과 함께 할 것을 소망하는 사람들에게는 복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부활에 대하여 믿기를 주저합니다.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고 과학적이지 않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으로 보기 전에는 믿지 않겠다고 했던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부활은 보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도마에게 “너는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사람이 자기가 부활이고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 말은 나는 곧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세상을 창조하고 주관하며 죽은 자를 살려내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고 주관자이시며 생명을 다시 살리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죽음 아래 있는 인간들에게 죽음에서 해방된다는 부활의 소식보다 더 큰 기쁨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곧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아멘!